반복창과 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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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시작된 최초의 증권은 미두를 이용한 선물이었다. 채만식의 탁류에도 나오는 미두(米豆)는 쌀 선물 거래다. 이 미두 거래로 흥했던 실존 인물로 반복창이라는 사람이 있다. 미두 중매점 종업원으로 알음알음 미두 시장에 대해 알아간 그는 결국 1920년 한 해에 엄청난 거금을 벌어 40만 원(2009년 기준으로 약 400억 원)이라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1919년 그가 처음 미두 시장에 뛰어들 때의 자본금이 500원(2009년 기준으로 약 5천만 원)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수익률(800배)이다. 이 돈으로 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당시 조선 최고의 미녀라는 김후동과 결혼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미두로 흥한 그는 미두로 망했다.
정점에 올랐을 때 손을 털었어도 괜찮았을 터인데, 미두 예측이 계속 빗나가자 2년 만에 모든 재산을 떨어먹고 사기를 쳐서 감옥에 갔다오게 된다. 돈 보고 결혼한 아내는 당연히 이혼하자고 했고, 크고 아름다운 집도 당연히 남의 것이 되었다. 결국 30세의 나이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고 정신이상까지 일으켜 비참하게 살다가 4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11]
반복창의 투기는 시기를 잘 탄 것인데, 1919년 여름은 은(銀)에 거품이 끼면서 중국의 구매력이 일시적으로 폭증하자[12] 그 수요를 채우기 위해 일본에서 경제 버블이 불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일본은 투기 문제로 인해 쌀 소동이 일어나 진작에 난리를 겪은 적이 있었으나, 하라 총리를 위시로 하는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은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후에 불었던 호황 덕을 톡톡히 보았기에 전쟁에서 이기면 호황이 나는 줄로 알고 있었으며 1919년의 버블도 버블이 아니고 전후에 응당히 일어나는 경제 붐으로 오판하였다.
수출만 하면 떼돈을 버니 너도 나도 수출을 했고 수요가 오르면 가격도 오르는 법이라 급기야 선물투기가 판을 치게 되었다. 이 선물투기는 당연히 쌀과 같은 현물을 놓고 하는 것으로, 반복창이 미두장에 뛰어들었던 시기와 일치하는 때이다.
그런데 이 버블이 1919년 말까지 지속되면서 물가지수가 33% 폭등하니, 과연 이건 경제 붐이라고 할 수는 없는 사태라, 일본은행 이노우에 준노스케 총재는 그동안 금리 상승과 재정 축소에 반대했던 하라 다카시 총리와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을 설득하여 콜 금리를 8.03%까지 올려놓았다.
1919년 11월의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버블은 해를 넘겨 1920년 2월까지 지속되었으나, 1920년 영국과 프랑스에서 모든 은화의 은 함유량을 크게 변경하는[13] 가치절하를 단행하자 은 가격이 폭락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국의 구매력을 지탱했던 은 버블이 폭발하자 중국의 수요는 바닥을 쳤고, 지금껏 중국의 수요로 지탱되었던 일본의 수출량은 땅으로 꺼졌고, 지금껏 일본의 수출량으로 지탱되었던 일본의 주식시장은 공전절후의 폭락을 맛보았으며, 투기 시장은 그냥 깨끗하게 폭발했다.
이른바 전후 버블이라고 하는 이 거품과 그 여파는 당대 일본 주식시장의 추이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데, 이 때 일본 주식시장 폭락은 한 차례로 끝나는 게 아니라 3월에 1번, 4월에 3번 등 장기간에 걸쳐 수 차례 발생하는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는 형국이었다. 1919년 3월 1일 239엔이었던 도쿄 주가지수는 버블이 터지기 직전인 1920년 3월 1일 549엔으로 마감했으나 버블이 터진 15일 349엔, 4월 14일 274엔, 5월 15일 217엔으로 반토막이 났을 뿐만 아니라 버블 이전보다 되려 지수가 더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 사이에 은행 21개가 부도났다.
이런 혼란 속에서 반복창 같은 투기꾼의 실력이 신통해봐야 얼마나 신통하겠으며 또 무사할 수 있을까? 애초에 반복창이 미두시장을 경험으로만 배웠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어떠한 형태로든 반복창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반복창은 과거 경험에만 의존해서 돈놀이를 했기 때문이다